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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나오던 첫 월급

 

 

사수에게 리눅스 교육을 받고 신입으로서 회사생활 한다고 눈치 보고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니 어느덧 월급날이 다가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번 적은 있었지만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나서 받는 첫 월급이었다. 예전에 아버지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라는 봉투를 들고 항상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전해준 기억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월급이라는게 얼마나 직장인에게 소중한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처음 한달동안은 돈도 없이 살았기 때문에 이번에 월급을 타면 월세도 내고 생활비 카드로 긁은것도 내고 돈 좀 남으면 맛있는것도 먹고 그래야겠다라는 희망찬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월급이 드디어 내 통장에 들어왔다.

 

"126만원"

 

내 첫 월급이었다. 왜 월급이 이것밖에 안되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난 1일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근무일수가 부족해서 월급이 짤리는 일은 없었다.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수습기간이었다 3개월에 30%를 깍아서 70%...

 

그렇다 3달동안은 이 월급을 받고 살았어야 했다. 요즘도 수습기간이랍시고 30%나 깍는 회사가 있을까 신입이라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참 너무한 월급이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전혀 기뻐할수가 없었다. 그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괜시리 눈물이 났다. 너무 개쪽팔리고 내가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고작 이딴 월급이나 받는게 너무 한심했다. 이제서야 내 스스로에 대한 값어치가 생각이 났다. 난 고작 126만원 밖에 안되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사들은 월급 받았으니 커피 한턱 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해도 욕쳐나오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는데 신입사원이 뭐라 따질 수 있나. 동기들이랑 같이 가서 커피 한잔씩 돌렸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참 괘씸하다 커피 쏴야 한다고 주도했던 양반은 그래도 임원급 인간인데 사원들 돈 얼마받는지 뻔히 알면서 그 커피 한잔 얻어쳐먹고 싶어서 하... 욕이 다 나올 지경이다. 커피가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이딴 월급을 주게되서 미안해 해도 모자랄판에 말이다.

 

그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것 같다. 뭔가 분한 마음도 들었고 뒤숭숭해서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고정비를 줄이기 위한 몸부림

 

3개월이 지나면 정상적인 월급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은 금액이다. 결국 이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서 방안을 찾아봐야 했다.

 

별안간 드는 생각이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막 뒤져봤다.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것같지는 않은데 체감이 들만한 국가지원책이 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중소기업 청년 소득세 감면제도 였고 이걸로 소득세를 90% 가량 줄일수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에 회사에 이걸 해달라고 요구를 했고 회사에서도 딱히 돈이 드는것 같지 않으니 바로 콜을 외치며 소득세 감면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웃긴건 이 제도가 시행된지 그래도 몇년 된 제도였는데 회사 사람들 중 이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그리고 가장 큰 비용인 월세를 줄여야 했다. 한달에 40만원 정도 냈는데 이걸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LH 전세제도가 있었다. 전세라 물론 큰 돈 들긴 했지만 이걸로 한달에 주거비용으로 거의 10만원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것도 신청을 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LH전세 신청해서 붙어서 살게 되었다. 고정비를 많이 줄일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던 나날들

 

아마 누군가가 이걸 보면 운 드럽게 좋아서 자랑질을 하네 싶을 것이다.

 

솔직히 맞다. 아니 자랑질을 하고 싶은게 아니라 운이 좋은것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운은 참 좋았던것 같았다. 특히나 LH전세제도는 나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줬었다. 월세가 기본적으로 50~60만원은 족히 하는 서울에서 10만원으로 살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메리트였다.

 

소득세도 줄이고 주거비도 줄이고 이것저것 많이 줄일수는 있었다. 결국 이게 너무 적은 월급 때문이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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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사수가 찾아왔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사수, 부사수라는 용어가 굉장히 익숙할 것이다. 정작 나는 해군 나와서 사수, 부사수라는 단어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런 단어가 회사에서도 쓰이는데 나와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상사가 사수 그리고 나는 부사수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나를 담당할 사수가 찾아왔다. 그 사수의 직책은 차장이었으며 회사에 정말 몇 없는 리눅스 + C 개발자였다. C/C++ 개발자가 귀하다고는 하는데 지금이야 나도 그 C/C++ 개발자라 정말 귀한건지는 체감이 잘 되지는 않으니 Java 개발자에 비해서는 귀하다고 하기는 하더라. 물론 귀하다는게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중소 SI회사가 그 귀하다는 C/C++ 개발자를 넘치게 보유할리는 없었고 딱 필요한 만큼만 있었던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C/C++ 개발자가 필요하다 생각해서 일단 신입 뽑고 키우자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 키움의 대상으로 당첨이 된거였고

 

이 차장님은 지금도 절대 잊을수가 없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람이니 말이다

 

 

 

 

  정말 체계적이었던 사수의 교육

 

사수라는 일이 사실 그렇게 쉬운것만은 아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부사수 교육도 시켜야 하고 지시도 내리고 진행상황도 체크하면서 본인 일까지 해야 하니 솔직히 짐덩이 하나 떠안은거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도 정말 기억에 남는 사수인데 이 분의 교육이 생각보다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내가 리눅스와 C언어를 하지 않은것을 대충 눈치 채고 지금 당장 생각나는대로 만들어 볼수 있는 것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제출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참 부끄럽게도 고작 만든것은 계산기였다. 그렇다. return  a+b, a-b, a*b, a/b 하는 그거 말이다. 무슨 1학년 신입생들이 C언어 수업 듣자마자 만들것 같은걸 만들어서 해냈다고 제출했다.

 

사수의 표정을 잊지 못하는데 잠시 당황한것 같았다. 사수는 아마 테스트를 통해 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파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 실력이 낮으니 당황했었을것이다.

 

그 뒤로 사수의 교육이 시작됐다. 내 사수는 주로 이전에 했던 프로젝트의 소스코드를 보여주고 소스코드를 분석해보라고 했고 그 다음 소스코드를 분석완료 하면 소스코드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한 다음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고 대체적으로 파악했다 싶으면 추가 기능을 간단하게 구현하게 하는 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모르는 것이 있어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해주고 중간중간 테스트도 진행하면서 진행상황도 물어보는 등 본격적으로 나를 교육 시켰다.

 

약간의 실무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을 섞어서 교육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나에게 효과가 좋았었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이 분을 만난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성격이 거칠어서 많이 혼났던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를 계속 다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사람이었다

 

 

 

 

 

 

 

 

 좋은 사수만 만나도 회사생활의 절반 이상은 성공이라고 봅니다

 

이건 본문을 벗어난 사견입니다. 지금도 드는 생각인데 나의 직속상사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중소 SI 회사를 다니게 된다면 그리고 연봉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업무량이 많아 힘이 든다 하더라도 만약 당신의 사수에게서 배울것이 많다면 그리고 그 사수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 회사는 다닐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경력을 쌓고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면 결국 개발자의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것은 경력과 탄탄한 도메인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프로젝트를 함에 있어서도 사수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회사를 다니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비록 중소 SI회사 다니면서 힘들어서 울고 싶은일도 많았지만 정말 좋은 사수를 만나서 내 몸값을 높일 수 있었고, 능력도 많이 향상시키는 등 뜻깊은 경험이었으며 이직을 할때 너무나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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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웹 개발자를 지망했는데?

 

대학교에서 전공수업을 들었을때 내가 정말로 좋아하던 수업이 있었다. 그것은 데이터베이스 과목이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DB 서버를 가지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하나 만들어서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과목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뭘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안잡히는 수업이었다.

 

그 때 나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기로 결심했었고 온라인에서 회원가입과 게시판 글쓰기, 추천기능 등이 들어가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하나 만들어서 발표를 했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밤을 새면서 코딩을 했었고 정말 코딩능력이 형편없었던 나였지만 그때는 뭐에 미친건지 즐겁게 수행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포트폴리오로 웹을 제출했었고 프론트엔드 웹 개발자가 될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입사를 하게 된 첫 날, 컴퓨터를 세팅하고 가만히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다가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었고 그 다음날 본격적으로 나에게 무언가 액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한권 던져지는 책이 있었는데 그건 놀랍게도 '리눅스 프로그래밍' 책이었다.

 

이걸 나에게 왜 주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사로부터 넌 이제부터 리눅스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저는 웹 개발로 지원을 했는데요?" 라고 했는데 리눅스 배워놔라 라는 이야기만 던지고 그렇게 상사는 사라졌다.

 

 

리눅스 해본적이 없는데?

 

난 리눅스와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학부생 시절에도 가장 자신없었던게 리눅스였고 특히 C언어는 토가 나올정도로 너무 싫었다. 난 ASP.NET과 C#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 땐 몰랐지. 중소기업은 이것저것 다 할수있는 만능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채용이 됐기에 당연히 난 웹개발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또 몰랐지 ASP.NET은 현업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 회사가 나를 뽑은건 내 포트폴리오와 도메인 지식을 본게 아니라 그냥 사람 없어서 뽑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리눅스로 할 줄 아는거래봐야 cd, mkdir, rmdir, vi 정도 밖에 없었다. 그 외에 아는것이 정말로 없었다. 그런데 어떡하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회사 분위기가 어느정도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 거부해봐야 뭘하겠는가 입사한지 하루밖에 안된 새파란 신입이 시키는대로 해야지

 

그렇게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책도 보고 하면서 리눅스 서버 개발자가 되기 위해 머리에 지식을 쑤셔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그렇게 머리에 쑤셔넣는다고 뭐가 되나. 일이 안풀리면 멘붕이 오고 절망감이 들기 마련인데 당시 딱 그런 상태였다. 그렇지만 난 운이 좋았던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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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로 살아온지 n년차가 되었다. 평범하게 개발자들이 신입으로 많이 들어간다는 중소SI에서 근무를 했었고 생각보다 오랫동안 근무를 했다. 3년은 커녕 1년만 되어도 신입사원들이 많이 퇴사를 하는건 내가 처음 회사를 다닐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바가 없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왜 이직을 오랫동안 하지 않고 오래다녔었는지는 의문이다.

 

요즘 중소SI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코로나 시기 잠시 개발자 붐이 일어났을때를 제외하고는 취업은 항상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취업을 했을때는 중소SI는 언제나 자리가 남아 돌았다. 예나 지금이나 SI는 악명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가디, 구디에 그렇게 넘치는 중소SI에도 자리가 없다고 한다. 뭔가 잘못된것 같다. 정말 역대급 취업 빙하기가 아닐수가 없다.

 

갑자기 그런 소식을 듣고 나니 내가 처음 중소 SI회사를 다니고 퇴사하기 까지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한번 써본다.

 

 

대기업은 몰라도 중견기업 정도는 들어갈 줄 알았지

 

군대를 전역하고 3,4학년을 바쁘게 보내서 학점을 따고 취업 준비를 했을때는 그래도 탄탄한 회사, 연봉을 그럭저럭 잘 주는 중견기업 정도는 들어갈 줄 알았다.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은 하겠지. 

고등학교 입학할때만 해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는 당연히 갈 줄 알았지만 2학년이 되면 조금의 현실을 깨닫고 눈을 조금 낮춰 인서울 유명 사립대 정도를 노리고 3학년 수험생이 되면 그때는 대학을 어딜갈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 하는건 거의 대부분 똑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 차가웠다. 대기업 서류광탈은 너무 기본이었고 단 한번 삼성 SSAT는 당시 서류만 내면 일단 볼 수 있는 기회를 줬기 때문에 그거 시험 보러 간것 말고는 아예 대기업 냄새 조차 맡아본적이 없었다.

 

그나마 공기업은 기회가 있었다. 개발자를 꿈꾸고 컴퓨터공학과를 전공으로 삼았지만 한국사 자격증, OPIc와 같은 어학 자격증 적당히 있었기 때문에 서류는 무난하게 통과가 됐었다. 하지만 면접에서 탈락하고, 인적성에서 탈락하면서 공기업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취준한지 반년도 안지났으니까 TV에서 보니까 뭐 공무원 준비한다고 3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반년 정도는 급한것도 아니니까 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난 이런 곳에서 절대 회사 안다닐거야

 

취준생이던 시절 먼저 취업한 친구와 한번 만난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건실한 대기업에 취직을 했었고 경기도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술을 마실만한 곳을 잘 몰랐다.

 

그런데 나도 당시 인천에 살았었는데 뭐 아나... 그래서 중간지점에서 만나자고 하다보니 가산디지털단지역 이라는곳에서 만났다.

 

가산디지털단지에 대한 것은 들은것이 있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개발자가 가장 많이 있는 곳, 중소 개발회사가 가장 많은 곳, 개발자의 희노애락이 사무치게 서려있는 곳 여튼 별로 좋은 소리는 못들었던것 같았다.

 

그래도 직장인들이 있는 곳이라 술집은 많았다. 그런데 공기부터 무거웠다. 뭔가 술 먹고 그러면 들뜬 분위기가 있어야 할텐데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축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횟집을 갔는데 개발자로 보이는 한 분이 이어폰을 끼고 조용하게 조그만 회 한접시와 함께 술을 하는 모습을 봤다.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한 모습들만 보고 있자니 여기서는 죽어도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난 절대 여기서는 일 안하겠다 라고 했다. 그때는 미래를 몰랐으니 친구랑 나랑 웃고 떠들면서 술 한잔을 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어디를 다닐지를 당시는 상상도 못하고 말이다

 

 

 

제발 면접이라도 좀 봤으면 좋겠다

 

이제는 점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1년동안 취준만 하다보니 점점 현실감각이 사라지는것 같았다. 자취를 했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해서 알바를 하면서 간간히 버는 그 돈으로 어영부영 살 수 있다보니 마음은 급한데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고 있는 모순적이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응원해주던 가족도 슬슬 전화를 하면 회사는 뭐 알아봤니? 라는 말이 나온다. 점점 차가워지는 느낌도 든다. 

 

알바비만으로는 월세와 생활비를 모두 충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몇개월에 한번씩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려 월세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눈치가 너무 보여서 도저히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이래서는 안됐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애당초 포기를 했었다. 이제서야 내 주제를 파악했다. 자기객관화가 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지금 내 값어치로는 대기업은 커녕 중견기업도 못간다 라고

 

이제서야 눈이 중소기업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는 그래도 중소 SI회사들은 자리가 넘쳤다. 그럴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지는 개발자로서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잘 알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온갖 중소 개발사에 자소서를 던지기 시작했다

 

 

 

잡코리아, 사람인, 인크루트

 

요즘은 개발자 커뮤니티가 굉장히 많다. 좋은 현상이다. 그리고 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단순한 커뮤니티 성격 뿐만 아니라 취업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고 구인공고 까지 낸다. 다양한 루트가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가

 

물론 내가 취업준비를 하고 있을때에도 다양한 루트가 존재했을수는 있겠지만 난 그런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소서를 여기저기 던져서 면접을 보고 회사를 다녀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잡코리아, 사람인, 인크루트는 정말 좋은 시스템을 가졌다. 자소서 하나만 써놓고 클릭 한번에 바로 지원까지 가능한 원클릭 지원 시스템이 그것이었다.

 

자소서를 완성하고 눈에 보이는 괜찮다 싶은 회사에는 모두 원클릭으로 넣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해서 거의 100군데 가까이 지원을 한것 같았다. 효과는 좋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면접 제의 전화가 왔으니까 이제서야 뭔가 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드디어 취업을 할 수 있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들은 당연히 대부분 가산디지털단지에 위치해있었다. 내가 절대 여기서 회사를 안다녀야지 하고 다짐했던 그 곳에 내 스스로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상이상의 회사들을 보면서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800만원이요? 저 대졸인데요

 

처음 면접 날짜가 잡혔던 그 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난 당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설레면서 긴장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회사를 다니면 어떻게 생활하고 돈을 벌면 돈을 어떻게 써야 하고 또 모으고 이런 청사진을 그려나가니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같이 가서 골랐던 깔끔한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기로 한 회사로 갔다. 면접 볼때는 검은 양말을 신어 깔끔한 이미지를 줘야 한다고 해서 검은 양말도 새로 하나 구매를 해서 신었다. 택시를 탔을때 택시기사님이 어이구 면접보러 가시나봐요? 할때 네 면접보러 갑니다 하면서 희망에 가득찬 목소리로 이야기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택시기사님이 청년이 장하네 꼭 취업 성공해서 원하는 꿈 이뤄라 라면서 덕담해주신것도 기억이 난다.

 

회사는 가산디지털단지역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왜 택시를 탔을까 싶은데 여하튼 회사는 생각보다 큰 빌딩을 소재지로 삼고 있었다. 회사 합격하면 나도 이런곳에서 출근하는건가 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갔다.

 

면접을 봤다. 생각보다 면접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기초적인 수준의 질문이었고 대답을 잘했고 면접은 성공적으로 끝난것 같았다. 속으로 이 정도면 합격일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의 마지막은 항상 "질문하실거 있으신가요"로 끝난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드는게 있었다. 지원하게 되면 연봉 정보를 꼭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중소기업은 면접을 볼 곳이 많기 때문에 그런것은 당당하게 물어보라는 글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제가 근무하게 된다면 연봉은 어느정도 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면접관들이 서로 수근수근 거리더니 1800만원이요 라는 대답을 했다. 처음에는 2800만원을 잘못들은줄 알았다. 너무나도 말도 안되는 연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취업이 급하다 한들 그 당시에도 1800만원은 정말 짜다 못해 말도 안되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앞자리가 2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1800만원이면 당시 알바를 다녀도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내가 고졸로 생각해서 연봉을 그렇게 부른건가 싶어서 아 저 대졸자입니다. 라고 이야기 했는데 면접관이 4년 대졸자 기준으로 1800만원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 거기서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회사를 나왔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기억 나는건 근처 편의점 앞 벤치에서 앉아서 절망하고 있었던 것만 기억이 났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연봉을 맞춰주는 회사를 찾았다

 

모든 가산디지털단지 소재의 회사가 그런건 아니겠지만 처음으로 겪은 면접과 회사가 이러니 가디가 소문만 들었지 이정도로 악명이 높을줄 몰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디 소재의 회사 말고는 딱히 지원할만한 곳도 없었다.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내가 요구하는 최소 수준의 연봉을 줄 수 있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정말 미친듯이 면접을 봤던 것 같다. 하루에 2~3번의 면접은 기본으로 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에 한번, 점심 시간 막 지나서 한번, 마지막으로 느즈막한 오후 쯤에 한번 이렇게 봤었다.

 

회사들이 전부 같은곳에 있는건 아니었으니 어떨때는 강남, 어떨때는 가디 어떨때는 송파 별의별 곳을 다 갔던것 같다. 어떤 곳은 다 무너져가는 건물에 직원 아무도 없고 앞으로 자네가 오면 팀장이야 라는 소리를 하는 회사도 있었고 어떤 곳은 들어갔더니 직원 아무도 없어서 어디갔냐고 물어보니 전부 파견갔다고 하는 회사도 있었고 어떤 곳은 굉장히 면접을 고압적으로 보는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회사들이 내가 요구하는 수준의 연봉을 맞춰주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이 시기에 내 주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바라지는 않았고 중소기업이 줄 수 있는 평균적인 연봉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그 마저도 안주는 회사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곳에서 면접을 봤더니 내가 생각하는 연봉 정도를 맞춰줄수 있다는 회사를 찾았다.

 

그럼에도 찜찜한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취준을 하기도 지쳤다. 여기를 다니기로 결심하고 입사하겠습니다 라고 한뒤 며칠 뒤 그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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